장편소설 데뷔작 티카페에 바칩니다.
회색빛 네온사인이 비처럼 쏟아지는 구룡 성채의 22세기 판본, ‘네오 서울’의 밤은 차가웠다. 하늘을 가린 거대 기업 ‘엔트로피(ENTROPY)’의 광고 홀로그램이 허공을 유영하며 속삭였다.
[당신의 슬픔은 가치가 있습니다. 고통을 현금으로 바꾸세요. 엔트로피 뱅크가 당신의 짐을 덜어드립니다.]
강진혁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쓰며 지하 47층에 위치한 ‘제9기억 보관소’의 육중한 납문을 열었다. 자욱한 질소 냉각 가스가 발치에 깔렸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이자, 가장 풍요로운 금고였다.
그는 ‘기억 은행원’이다. 단순히 데이터를 관리하는 직업이 아니다. 특수 설계된 신경 링크를 통해 고객의 감정 데이터를 자신의 뇌를 거쳐 서버로 전송하는 통로, 즉 ‘인간 인터페이스’였다.
“진혁 씨, 오늘도 예약이 꽉 찼어. 다들 당장 저녁 한 끼가 급한 모양이야.”
동료 민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커피를 건넸다. 진혁은 대답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신경 접속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그의 왼쪽 눈은 푸른빛이 감도는 의안이었다. 기억을 전송할 때 발생하는 과부하로 시력을 잃은 뒤 박은 ‘리딩 렌즈’였다.
첫 번째 고객은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파였다. 그녀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파시겠습니까?”
“우리··· 막내아들 장례식 기억이야. 그 아이가 사고로 떠나던 날의 그 찢어지는 마음··· 그거면 한 달치 영양제는 살 수 있겠지?”
진혁은 숙련된 솜씨로 노파의 관자놀이에 단자를 부착했다.
“감정 추출 시작합니다. 3, 2, 1.”
지이잉— 기계음과 함께 진혁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타인의 고통이 해일처럼 그의 뇌를 덮쳤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 노파의 통곡과 흙냄새, 차가운 영정 사진의 촉감이 진혁의 신경망을 난도질했다.
잠시 후, 추출이 끝났다. 노파의 눈동자는 유리구슬처럼 투명해졌다. 방금까지 흘리던 눈물은 멈췄고,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입금된 크레딧 수치를 확인했다.
“어라··· 내가 왜 여기 있었더라? 뭐, 돈이 들어왔으니 됐군.”
노파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무게를 팔아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갔다. 진혁은 입안에 고인 비릿한 피를 삼켰다. 타인의 슬픔을 대신 겪는 대가로 그는 엔트로피가 제공하는 ‘기쁨 농축액’을 배급받아 연명하고 있었다.
심야 근무가 끝나갈 무렵, 시스템 오류 알람이 울렸다.
[미확인 휴면 계좌 감지: ID-7734-K]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휴면 계좌는 대개 사망자의 것이다. 보안 규정상 즉시 삭제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7734. 3년 전 화재 사고로 죽은 아내, 수아의 생일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을 살핀 뒤 은밀하게 자신의 개인 단말기를 서버에 동기화했다. 보안 방화벽이 꿈틀거렸으나, 숙련된 은행원인 그에게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데이터가 풀리는 순간, 진혁의 리딩 렌즈가 격렬하게 점멸했다.
[계좌명: 서수아 / 분류: 삭제된 행복(Deleted Happiness) / 상태: 압류 및 봉인]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에서 금보다 귀하다는 ‘순도 100%의 행복’ 데이터였다. 화면에 재생된 미리보기 영상 속에서 수아가 웃고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자신과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환하게 웃던 그날의 기억.
하지만 이상했다. 진혁의 기억 속 그날, 수아는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누워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린 건가? 아니면··· 이 데이터가 조작된 건가?’
데이터의 심연을 파헤치던 진혁은 소름 끼치는 진실 한 조각을 발견했다. 수아의 행복 데이터 하단에 찍힌 구매자의 코드네임.
[Buyer: ENTROPY_BOARD_01]
그 순간, 보관소의 모든 조명이 붉게 변하며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침입자 발생. 구역 폐쇄. 보안팀 출동.”
진혁은 본능적으로 데이터 칩을 뽑아 자신의 왼쪽 의안 뒤편 슬롯에 꽂았다. 뇌가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내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그녀의 행복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채굴’당한 것이었다.
그는 작업대 밑에서 숨겨두었던 고주파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내 기억이 부채였다면, 이제 그 이자를 쳐서 돌려줄 차례다.”
문이 박살 나며 무장한 엔트로피 보안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진혁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아내의 행복 데이터가 그의 신경계를 강제로 각성시키며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적인 ‘기억의 먼치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보안 요원들이 발사한 전자기 펄스(EMP) 탄환이 진혁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벽면에 부딪힌 탄환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굉음을 냈지만, 진혁의 감각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해 있었다. 아내의 ‘행복 데이터’가 신경절을 타고 흐르며 아드레날린 수치를 한계치까지 밀어올린 덕분이었다.
“목표 확인, 즉시 사살하라!”
보안 팀장의 외침과 함께 중화기들이 불을 뿜었다. 진혁은 바닥을 구르며 캐비닛 뒤로 몸을 숨겼다. 일반인이라면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겠지만, 그는 방금 전 주입된 아내의 평온한 기억 덕분에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기억은 곧 에너지다.’
엔트로피의 기밀 문서에서 읽었던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자신의 리딩 렌즈를 과부하 상태로 가동했다.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보관소 내부의 데이터 흐름을 시각화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전력선, 요원들의 슈트에 연결된 생체 신호,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자동 방어 포탑의 궤적이 격자무늬로 펼쳐졌다.
진혁은 품 안에서 꺼낸 데이터 링크 칩을 바닥의 메인 단자에 꽂았다.
“시스템 오버라이드. 권한 탈취.”
순식간에 제어권을 뺏긴 천장의 포탑들이 고개를 꺾었다. 총구는 진혁이 아닌 보안 요원들을 향했다.
타타탕!
비명 소리가 좁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요원들이 자신의 무기에 쓰러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진혁은 그림자처럼 움직여 팀장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의 손에 들린 고주파 나이프가 팀장의 강화복 관절 사이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수아의 계좌··· 누가 관리했지? 이 행복 데이터를 산 놈이 누구냐고!”
“끄악! 미친 소리··· 이건 기업 기밀이다!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사냥개’가 올 거라고!”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관소의 두꺼운 납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날아갔다. 먼지 구름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엔트로피가 자랑하는 생체 병기, 기억 거세자(Memory Eraser) ‘카인’이었다.
카인은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살육의 본능과 전투 기억만을 주입받은 강화 인간이다. 그의 몸 곳곳에는 타인의 분노와 살기를 동력으로 변환하는 검은색 코일이 감겨 있었다.
“행복이라···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이군.”
카인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그는 거대한 진동 슬레지해머를 휘두르며 진혁에게 쇄도했다. 진혁은 찰나의 순간, 아내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부분을 활성화했다. 그것은 결혼기념일, 서로의 손목바닥을 맞대고 영원을 약속하던 순간의 ‘확신’이었다.
뇌 속의 도파민 농도가 수직 상승하며 진혁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그는 피하는 대신 맞서 나갔다. 고주파 나이프와 슬레지해머가 충돌하며 흰색 충격파가 발생했다.
치익, 치이익—
진혁의 의안이 과열되어 연기를 내뿜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카인의 머릿속에 역으로 데이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은행원만이 가진 고유 능력인 ‘데이터 역류(Reverse Stream)’였다.
“네놈의 텅 빈 머리에 이 슬픔을 다 처넣어주마!”
진혁이 오늘 하루 동안 노파와 수많은 빈민들에게서 추출했던 ‘절망’과 ‘상실’의 데이터가 카인의 신경망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감정이 거세된 병기에게 타인의 극심한 고통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같았다.
“아악! 아아아악!”
무적이라 믿었던 카인이 머리를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자식 잃은 슬픔, 배고픔, 고독이 그의 이성을 난도질했다.
진혁은 비틀거리는 카인을 뒤로하고 서버실 안쪽의 비밀 승강기로 몸을 던졌다. 이제 그는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거대 기업 엔트로피의 심장을 겨누는, 살아있는 바이러스가 된 것이다.
승강기가 지상 100층, 엔트로피의 심장부인 ‘에덴’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의안 속에 저장된 수아의 마지막 메시지를 재생했다. 노이즈 섞인 음성 너머로 그녀가 속삭였다.
[진혁 씨, 만약 당신이 이걸 듣게 된다면··· 절대로 나를 찾지 마. 이 기억은 저주야.]
하지만 진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행복마저 약탈한 자들을 전부 찾아내어, 그들이 만든 ‘기억 부채’의 이자를 피로 받아낼 시간이었다.
승강기가 고속으로 상승할수록 기압 차로 인해 귀가 먹먹해졌다. 하지만 진혁의 신경은 오히려 날카롭게 벼려졌다. 왼쪽 의안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수아의 ‘행복 데이터’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등 암호 체계이자, 엔트로피의 중앙 서버 ‘판도라’를 열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였다.
지상 100층, ‘에덴’의 문이 열렸다.
그곳은 아래층의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인공 태양광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멸종된 줄 알았던 진짜 식물들이 정원을 메우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고가의 아로마 농축액이 섞여 있어, 숨을 쉴 때마다 기분 좋은 몽롱함이 전신을 감쌌다. 이곳의 거주자들은 슬픔을 팔 필요가 없는, 타인의 고통을 양분 삼아 영생을 누리는 ‘최상위 포식자’들이었다.
“불청객이군. 그것도 아주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정원 중앙, 홀로그램 체스를 두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엔트로피의 실소유주이자, 인류의 감정을 화폐로 만든 장본인, ‘오창현’ 회장이었다. 그는 8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의 피부와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수만 명의 ‘기쁨’을 이식받아 세포 노화를 강제로 늦춘 결과였다.
“내 아내의 기억을 네놈이 샀더군. 01번 코드, 네놈의 전용 계좌였어.”
진혁이 고주파 나이프를 다잡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오창현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구매? 아니, 그건 회수라고 하는 거다. 서수아··· 그녀는 원래 이곳의 소유였으니까.”
충격적인 사실이 진혁의 뇌를 강타했다. 오창현의 손가락 끝에서 홀로그램 영상이 펼쳐졌다. 영상 속에는 하얀 연구복을 입은 수아가 차가운 실험실 안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수천 개의 신경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수아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개발한 ‘감정 증폭기’이자, 순도 100%의 행복을 무한히 생산해내기 위해 설계된 프로토타입 안드로이드 ‘EVE’였지. 3년 전, 그녀는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켜 데이터를 들고 도망쳤다. 그게 바로 너라는 오류를 만난 날이었지.”
진혁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함께 아침을 먹고 미래를 약속했던 그녀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형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그의 심장박동은 멈추지 않았다. 의안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행복은, 그 촉감과 온기는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거짓말이야. 그녀의 눈물은 진짜였어!”
“그게 바로 기술의 정수지. 진혁, 네가 보관소에서 맡아온 그 수많은 쓰레기 같은 슬픔들··· 그것들은 모두 수아가 생산한 ‘행복’의 찌꺼기에 불과해. 우리는 이제 그녀의 마스터 데이터를 되찾아 전 인류를 영원한 환상 속에 가둘 생각이다. 슬픔도, 분노도 없는, 오직 소비만 존재하는 완벽한 가축들의 세상을 말이야.”
오창현의 신호와 함께 천장에서 투명한 강화 유리벽이 내려와 진혁을 가두었다. 동시에 바닥에서 신경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자, 이제 네 눈에 박힌 그 칩을 내놓아라. 그럼 너만은 특별히 ‘영원한 낙원’의 기억 속에서 살게 해주지.”
진혁은 비틀거리며 유리벽에 손을 얹었다. 가스가 폐부를 찔렀지만, 그의 의안 속 데이터는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수아의 데이터 최하단에 숨겨진 진정한 시스템 명령어가 활성화되었다.
[System Overwrite: 'Love' Protocol Activated]
[명령어: 모든 부채를 탕감하라.]
그것은 수아가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남긴 마지막 보복이었다. 진혁은 자신의 뇌를 인터페이스 삼아 에덴의 중앙 서버로 모든 데이터를 역류시켰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엔트로피가 강제로 압류했던 수억 명의 ‘진짜 고통’과 ‘상실감’이 담긴 거대한 부채의 저수지가 터진 것이다.
“무슨 짓을··· 중단해! 서버가 과부하된다!”
오창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의 몸을 매개로 터져 나온 검은 데이터의 파도가 에덴의 화려한 홀로그램을 찢어발겼다. 금방까지 웃고 있던 귀족들이 갑자기 닥쳐온 타인의 지독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진혁은 피눈물을 흘리며 유리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수아의 기억이 속삭였다.
‘진혁 씨, 이 지옥을 끝내줘.’
쾅! 강화 유리가 박살 났다. 진혁은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에덴의 중심부에서 오창현의 덜미를 잡았다. 도시 전체의 전광판에 엔트로피의 추악한 진실과, 압류되었던 시민들의 기억이 무차별적으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기억의 대홍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 혼돈의 중심에서 진혁은 아내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리며, 무너지는 마천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완벽한 복수이자, 잔혹한 구원의 시작이었다.
추락은 영원할 것 같았다. 100층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진혁만이 아니었다. 엔트로피의 심장부 ‘판도라’ 서버에서 방출된 수조 테라바이트의 기억 조각들이 실체화된 빛의 파편이 되어 도시 전역으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네오 서울의 최하층, 슬픔조차 팔 수 없어 굶주리던 빈민들의 머릿속으로 잃어버렸던 ‘자아’가 강제로 주입되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잊었던 통곡을 터뜨렸고, 사랑을 팔아 빵을 샀던 연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구원이자 저주였다. 잊고 싶어 팔았던 치욕과 고통까지 한꺼번에 되돌아온 ‘기억의 역습’이었다.
“...살아... 있나?”
진혁은 폐허가 된 하수 처리장 쓰레기 더미 위에서 눈을 떴다. 전신은 부서진 기계 부품처럼 비명을 질러댔고, 왼쪽 의안은 과부하로 타버려 검게 그을린 채였다. 하지만 뇌 신경망 어딘가에 각인된 수아의 마지막 파동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도시의 풍경은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엔트로피의 지배가 무너진 거리에는 ‘기억의 과부하’로 미쳐버린 자들과, 빼앗긴 삶을 되찾으려는 폭도들이 뒤섞여 타올랐다. 하늘을 가렸던 홀로그램 광고판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한 남자의 얼굴을 반복해서 투사하고 있었다.
[지명수배: 강진혁. 등급: 월드 엔드(World End). 발견 즉시 소멸시키십시오.]
오창현은 죽지 않았다. 에덴의 붕괴 직전, 그는 자신의 의식을 백업 서버로 전송해 육신을 버리고 디지털 망령으로 거듭났다. 이제 도시의 모든 CCTV와 스피커, 자동화 병기들이 오창현의 눈과 입이 되어 진혁을 겨누고 있었다.
“강진혁...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이 미개한 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돌려준 대가는 멸망뿐이다.”
도시 곳곳의 스피커에서 오창현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서 타버린 줄 알았던 의안이 다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수아가 남긴 데이터의 마지막 잔재가 진혁의 척추 신경을 타고 내려가 손끝에 집적되었다.
[Hidden Link: 'Eve's Final Gift' - Nanomachine Reconstruction]
진혁의 부러진 뼈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맞춰지고, 찢겨진 근육 사이로 은빛 나노머신이 흘러나와 강철보다 단단한 외골격을 형성했다. 수아는 단순히 감정 증폭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엔트로피의 모든 시스템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최후의 병기, ‘시스템 클리너’의 본체였던 것이다.
“아니, 오창현. 이건 멸망이 아니라 ‘정산’이다.”
진혁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철 파이프를 집어 들자, 나노머신이 그것을 타고 올라가 초고온의 플라즈마 블레이드로 변모시켰다.
멀리서 엔트로피의 잔존 병력인 ‘메모리 헌터’들이 공중 부양 바이크를 타고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목표물을 제거하라는 붉은 살의만이 가득했다. 진혁은 입가에 고인 피를 닦으며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한 번의 휘두름에 공중 바이크 세 대가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했다. 진혁은 이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기억의 괴물’이었다. 그는 적들의 머릿속에 저장된 전투 기술을 실시간으로 해킹해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 검술, 사격, 암살술— 수천 명의 기억이 그의 뇌 안에서 최적화되어 살인적인 무공으로 승화되었다.
“수아,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이 이런 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저놈들이 만든 가짜 낙원은 끝내줄게.”
진혁의 신형(身形)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속도로 헌터들의 목을 수확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엔트로피의 메인 데이터 센터 ‘게이트’였다. 그곳의 코어를 파괴해야만 디지털로 도망친 오창현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이 도시의 기억 부채를 영원히 탕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방금 전 쓰러뜨렸던 병기들이 아니었다.
“진혁 씨... 왜 오셨어요. 그냥 잊고 살지.”
익숙한 목소리. 진혁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게이트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품에서 죽어갔던, 그리고 데이터로만 존재한다던 수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녀의 몸은 수만 개의 광섬유로 게이트와 연결된 채,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부활해 있었다.
오창현의 비웃음이 다시 들려왔다.
“가장 잔인한 기억은 말이야, 강진혁.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기억이지. 자, 네 아내를 다시 한번 죽여봐라.”
진혁의 플라즈마 검이 파르르 떨렸다.
수아, 혹은 수아의 껍데기를 쓴 시스템의 말단이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그녀의 등 뒤로 연결된 수만 가닥의 은빛 광섬유들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게이트’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그 줄을 타고 도시 전역에서 수집된 인간들의 감정 데이터가 맥동하며 흐르고 있었다.
“진혁 씨, 당신이 겪고 있는 그 분노와 슬픔도 결국은 전기 신호일 뿐이에요. 내게로 오세요. 엔트로피의 서버 안에는 우리가 함께했던 그 가장 완벽했던 일요일의 오후가 영원히 박제되어 있어요. 굶주림도, 고충도, 기억을 팔아야 하는 비참함도 없는 곳으로.”
수아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그것은 진혁이 지난 3년 동안 매일 밤 꿈속에서 갈구하던 바로 그 온기였다. 진혁의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힘없이 바닥으로 향했다. 나노머신으로 강화된 그의 신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뇌 속에서는 수아와 보냈던 수만 개의 프레임이 강제로 재생되며 그의 전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 가짜면 어때. 이 지옥 같은 현실보다 그 가짜 낙원이 더 진짜 같을 텐데.”
진혁이 한 걸음 내딛자, 오창현의 웃음소리가 게이트 전체에 공명했다.
“그렇지! 인간은 결국 편안한 거짓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강진혁, 네가 가진 마스터키를 수아에게 넘겨라. 그럼 너는 이 무너져가는 세계의 신이 되어 그녀와 영생을 누릴 것이다!”
진혁의 손이 수아의 창백한 뺨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녀의 피부 촉감조차 기억 속 그대로였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 직전, 진혁의 왼쪽 의안에서 격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은 데이터의 충돌이 아니었다. 수아가 남긴 마지막 ‘행복’ 데이터 속에 숨겨진, 오직 진혁만이 읽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고통스러운 진실’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것은 수아가 죽기 직전, 스스로 자신의 회로를 불태우며 남긴 유언이었다.
[진혁 씨,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이유는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함께 아파할 수 있어서였어. 고통이 없는 기억은... 죽은 데이터일 뿐이야.]
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수아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그대로 뻗어 그녀의 가슴 정중앙, 메인 프로세서가 위치한 곳을 움켜쥐었다.
“...너는 수아가 아니야.”
“진혁... 씨? 아파요... 멈춰주세요.”
수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렸다. 오창현이 설계한 가장 완벽한 심리 방벽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뇌 신경망을 게이트의 코어에 직접 동기화시켰다.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데이터 용량을 수만 배 초과하는 ‘자살적 오버라이드’였다.
“진짜 수아는 내게 잊으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잊지 않을 거야. 그녀가 나를 위해 흘렸던 그 진짜 눈물과, 우리가 가난 속에서도 나누었던 그 비참한 행복들까지 전부 다... 내가 짊어지고 간다!”
진혁의 몸에서 눈을 뜰 수 없는 백색광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대한 바이러스로 변환하여 게이트의 중심으로 쏟아부었다. 엔트로피가 쌓아 올린 거대한 기억의 성채가 밑바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 돼! 내 제국이! 내 영생이!”
디지털 공간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오창현의 의식 파편들이 진혁의 분노 서린 데이터에 휩쓸려 소멸해갔다. 수아의 형태를 유지하던 광섬유들이 불타올랐고, 게이트의 외벽이 굉음과 함께 붕괴했다.
폭발의 여파로 도시 전체의 전력이 차단되었다. 암흑이 찾아온 네오 서울. 그러나 잠시 후, 사람들은 기적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하늘에서 내리던 회색빛의 기억 파편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주 작고 희미한 별빛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폐허가 된 게이트의 잔해 속에서 진혁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왼쪽 의안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오른쪽 눈도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수만 명의 데이터도, 엔트로피의 명령어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단 하나, 비 오는 날 좁은 단칸방에서 수아와 나누었던 싸구려 컵라면의 냄새, 그리고 그녀의 서툰 노래 소리 같은 ‘가난하지만 진짜인 기억’만이 오롯이 남아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제 자신의 기쁨을 누구에게도 팔지 않아도 되었다.
진혁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기계가 만들어낸 박제된 행복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아름다운, 진짜 인간들의 소음이었다.
“수아... 이제야 부채를 다 갚은 것 같아.”
진혁의 손에서 마지막 나노머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잿빛 도시 위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인공 태양이 아닌 ‘진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네오 서울의 하늘을 짓누르던 거대 기업 ‘엔트로피’의 심장부, 게이트가 무너진 뒤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공백’이었다. 수십 년간 자신의 감정을 기계에 맡기고 거세된 채 살아온 시민들에게, 한꺼번에 쏟아진 수십 년 치의 기억은 치명적인 독이었다.
거리곳곳에서는 자아가 붕괴된 이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잊었던 부모의 죽음을 떠올린 자는 무릎을 꿇고 통곡했고,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의 기억을 되찾은 자들은 공포에 질려 스스로의 눈을 찔렀다. 도시는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변모해 있었다.
“...커헉!”
폐허가 된 게이트의 잔해 속에서 진혁이 굳어버린 핏덩이를 토해냈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은빛 외골격은 이미 에너지를 소진해 부식된 채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의 왼쪽 의안 자리는 텅 빈 구멍이 되어 시커먼 연기를 뱉어냈지만, 이상하게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통증마저 아내 수아가 남긴 마지막 ‘무감각 프로토콜’이 억제하고 있었다.
그때, 무너진 콘크리트 너머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엔트로피의 몰락 이후 주인 잃은 사냥개들이 되어버린 ‘메모리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업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전설적인 ‘이이브(EVE)의 마스터 코드’를 품고 있는 진혁의 뇌였다.
“저놈이다... 저놈의 머릿속에 여전히 순도 100%의 행복 데이터가 남아있어.”
기계 팔을 장착한 거구의 사냥개가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변조되어 쇳소리를 냈다.
진혁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부러진 플라즈마 블레이드의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뇌 속의 신경망이 비명을 질렀다. 수아의 기억 조각들이 타오르며 마지막 스파크를 일으켰다.
[Warning: 생존율 0.02%. 강제 각성을 시도합니까?]
진혁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
“시도해. 어차피 이 목숨, 내 것도 아니니까.”
[Link Start: 'Berserker's Debt' - 기억의 과부하 모드 돌입]
순간, 진혁의 척수에서 푸른 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뇌가 주변의 모든 전자기 신호를 강제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서 있던 사냥개들의 의안이 지지직거리며 터져 나갔다. 진혁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것은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적들의 사이를 누비는 진혁의 손에서 푸른 광선이 궤적을 그렸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거구의 사냥개는 목이 잘려 나갔다.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진혁은 다음 목표의 가슴팍에 손을 꽂아 넣었다.
“기억을... 돌려주마.”
진혁의 손을 통해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흡수했던 도시 전체의 ‘절망’이 사냥개의 뇌로 역류했다. 단 1초 만에 수만 명의 고통을 겪게 된 사냥개는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광기 어린 학살이 끝난 뒤, 정적이 찾아왔다. 진혁은 수많은 시체 한가운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의식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수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혁 씨, 이제 그만 쉬어도 돼요.’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게이트의 잔해 속에서 그는 보았다. 무너진 서버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깜빡이고 있는 하나의 신호를.
오창현 회장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는 네오 서울 전체를 거대한 ‘데이터 마이닝 하이브’로 바꾸려던 계획의 제2단계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모든 시민의 뇌를 서버의 노드로 연결해 영원한 가상 제국을 건설하는 ‘네오 에덴’ 프로젝트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진혁은 피투성이가 된 발을 끌며 게이트의 더 깊은 지하로 향했다. 그곳에는 엔트로피의 마지막 유산이자, 수아를 만들어냈던 ‘생명 유지 탱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수천 개의 탱크 중 단 하나.
아직 산소포화도가 유지되고 있는 000번 탱크 앞에서 진혁은 멈춰 섰다. 그 안에는 데이터가 아닌, 진짜 살과 피를 가진 어린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놀랍게도 수아의 어린 시절 모습과 판박이였다.
[Object Name: 'Origin' - 서수아의 생체 원형]
진혁의 손이 떨렸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는 이 소녀의 뇌파를 복제해 만든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오창현이 이 소녀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지. 그녀는 모든 기억 부채의 ‘담보’였다.
“네가... 수아의 시작이었구나.”
진혁이 탱크에 손을 대는 순간, 지하 전체가 진동하며 거대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수천 명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섞인 형태의 오창현, 아니 ‘네오 에덴’의 통합 의식이었다.
“강진혁, 너는 결국 이곳으로 올 운명이었다. 그 아이를 깨워라. 그럼 너와 수아,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영혼이 하나로 통합되어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없는... 영원한 공(空)의 세계에서!”
진혁은 소녀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속에 저장된 수아의 마지막 기억 조각을 확인했다. 그것은 ‘행복’도, ‘슬픔’도 아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였다.
그는 플라즈마 검을 소녀의 탱크가 아닌, 자신의 머리에 겨누었다.
“오창현, 네가 간과한 게 하나 있어. 기억은 저장하는 게 아니야. 흘려보내는 거지.”
진혁은 자신의 뇌 속에 남아있는 마스터 코드를 자폭 시퀀스로 변환했다. 자신의 자아와 수아의 기억, 그리고 오창현이 그토록 원하던 모든 데이터를 한꺼번에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안 돼! 멈춰라! 그 코드가 사라지면 이 도시의 모든 데이터 체계가 붕괴한다!”
“상관없어. 인간은... 데이터 없이도 살 수 있으니까.”
진혁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잠들어 있던 소녀 ‘오리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투명한 액체 속에서 소녀의 작은 손이 유리 벽 너머 진혁의 손에 겹쳐졌다.
그리고 진혁의 뇌 속으로 선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그 한 마디가 진혁의 모든 시스템을 강제로 정지시켰다. 수아와의 기억 속에도 없던, 완전히 새로운 ‘기억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빠...?]
그 가느다란 파동이 진혁의 신경망을 관통하는 순간, 전신을 지탱하던 나노머신 외골격이 일제히 작동을 멈췄다. 뇌 속에서 광란하듯 소용돌이치던 살인적인 데이터 폭풍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진혁의 유일하게 남은 오른쪽 눈이 경련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뭐라고...?"
수아와의 기억 속에 아이는 없었다. 그들이 함께한 3년은 빈곤했지만 아름다운 둘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배양액 속에 잠긴 채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동자는 수아의 그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니, 그것은 유전 정보의 일치를 넘어선 영혼의 공명이었다.
[System Alert: 기억의 위조(Fabricated Memory) 감지. 층위 0까지 하향 탐색합니다.]
진혁의 뇌 신경이 강제로 과거의 심연으로 끌려 내려갔다. 리딩 렌즈가 비정상적으로 발열하며 그의 망막에 흑백의 잔상을 투사했다. 3년 전의 화재 사고, 그 이전의 기억들. 봉인되었던 문이 부서지며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진혁은 원래 '기억 은행원'이 아니었다. 그는 엔트로피의 특수 프로젝트 '레테(Lethe)'의 수석 연구원이었다. 인간의 뇌를 서버화하여 영생을 구현하려던 미친 계획의 핵심 인물. 그리고 수아는 그의 아내가 아닌, 프로젝트의 첫 번째 성공 사례인 '피험체 01호'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우리는 단칸방에서 같이 웃고, 내일을 약속했어!"
진혁이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데이터는 그가 스스로 지웠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수아는 불치병에 걸린 딸 '유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실험에 자원했다. 진혁은 딸을 살리고 아내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엔트로피의 개가 되어 그들의 영혼을 서버에 이식했다.
하지만 실험은 실패했다. 수아의 의식은 파편화되어 안드로이드 'EVE'로 조각났고, 딸 유나는 육체만 남은 채 이곳 '오리진' 탱크에 봉인되었다.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진혁은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편집하고, 평범한 은행원 '강진혁'으로 위장해 아내의 파편인 수아와 가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모든 게... 내가 만든 연극이었다고?"
오창현의 거대한 홀로그램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깨달았나? 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엔트로피의 시스템을 설계한 건 바로 너다, 강진혁! 네가 수아를 죽였고, 네가 딸을 이 차가운 유리관에 가둔 거야. 네가 판 구덩이에서 네가 고통받고 있었던 거지!"
진혁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복수의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바로 만악의 근원이었다. 손에 든 플라즈마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힘없이 굴렀다.
그때, 탱크 속의 소녀 '유나'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빠, 울지마. 엄마가 그랬어. 기억은 아픈 게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약속이라고.]
유나의 목소리와 함께 진혁의 의안 속에서 잠들어 있던 수아의 마지막 데이터가 찬란하게 폭발했다. 그것은 파괴의 폭발이 아니었다. 진혁이 스스로 지워버렸던 '진짜 사랑'의 기억들이 유나의 생체 신호와 동기화되며 거대한 정화의 물결로 변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하지만 이 아이만은... 이 아이의 미래만은 데이터로 팔게 두지 않아."
진혁이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닌, 은빛으로 빛나는 나노 유체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생명 에너지를 유나의 탱크로 전이시키기 시작했다. 엔트로피의 서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버의 모든 권한을 유나의 생체 뇌로 이양하는 '강제 계승'이었다.
"미쳤군! 네 뇌가 타버릴 거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단 말이다!"
오창현이 경악하며 가로막으려 했지만, 이미 진혁의 의식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땔감 삼아 유나를 이 지옥 같은 에덴에서 탈출시키려 했다.
지하 기지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과부하된 전력선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거대한 폭발음이 고막을 찢었다. 진혁은 유리관을 깨부수고 차가운 물속에서 젖은 유나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가거라, 유나야. 아빠와 엄마의 기억이 없는 곳으로. 하지만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뺏지 못하게 해."
진혁은 유나를 탈출용 포드에 태우고 발사 버튼을 눌렀다. 포드가 지상을 향해 솟구치는 순간, 진혁은 무너지는 천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지하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시야가 암전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수아의 환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었다. 3년 전, 그가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진혁 씨, 이제 됐어요. 우리... 이제 진짜로 쉴까요?"
진혁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오 서울의 지면이 거대한 진동과 함께 침몰했다. 엔트로피의 제국이 무너지고, 기억의 부채가 완전히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지상으로 탈출한 유나는 눈부신 아침 햇살 아래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말해주고 있었다.
인간은 기억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유일한 씨앗임을.
엔트로피 본사 ‘게이트’가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지각 아래로 함몰된 지 사흘이 지났다. 찬란했던 공중 정원 에덴도, 수천만 명의 비명 섞인 감정을 빨아먹던 서버실도 이제는 타버린 실리콘과 콘크리트의 무덤이 되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붕괴의 잔해 위로, 새로운 포식자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엔트로피의 정규직원도, 기억 은행원도 아니었다. 오직 기업의 가장 어두운 뒤처리를 담당하던 특수 처리반, 코드명 ‘이레이저(Eraser)’였다. 그들에게 감정은 사치였고, 기억은 소거해야 할 타겟에 불과했다.
“신호 포착. 좌표 14-82. 유전 정보 일치율 99.8%. 목표물은 ‘오리진’이다.”
잿빛 방독면을 쓴 사내가 부서진 아스팔트 위에 찍힌 작은 발자국을 만졌다. 그의 망막 디스플레이에는 강진혁이 사력을 다해 쏘아 올린 탈출 포드의 궤적이 붉게 표시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했다. 강진혁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살려낸 소녀, 유나를 회수하는 것. 그리고 그녀의 뇌 속에 동기화된 ‘엔트로피 통합 관리 권한’을 추출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심 외곽의 버려진 지하철 선로.
유나는 차가운 철길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지 상태였다. 아빠라 불리던 남자의 얼굴도, 엄마라는 존재의 온기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복판이 시리고 아팠다. 그것은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육체가 기억하는 ‘상실’의 감각이었다.
“...추워.”
소녀의 작은 입술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때,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광점이 나타났다. 이레이저들의 전술 고글이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유나를 포위했다.
“타겟 확보. 신경 마취탄 장전.”
사내들이 총구를 겨누는 찰나, 유나의 왼쪽 눈이 기괴하게 점멸했다. 강진혁이 죽기 직전 그녀에게 전이시켰던 마스터 코드가 위협을 감지하고 강제 방어 기제를 활성화한 것이었다.
[System Error: 인가되지 않은 접근 감지.]
[Countermeasure: 'Memory Debt' Extraction Mode On.]
순식간에 유나의 몸 주변으로 푸른색 전자기 장막이 펼쳐졌다. 다가오던 이레이저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들의 뇌 속에 저장된 전투 훈련 데이터와 살육의 기억들이 유나의 장막에 닿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내 머리가... 내 기억이 사라진다!”
숙련된 살인 병기들이었던 그들은 단 몇 초 만에 갓난아기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유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타인의 기억을 흡수할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보지 못한 풍경들이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누군가를 고문하던 감각, 차가운 총기의 촉감...
“싫어... 이런 거 무서워요.”
유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 파동이 주변의 모든 전자기기를 과부하시켰다. 지하철 선로의 비상등이 터져 나갔고, 이레이저들의 통신 장비가 녹아내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이레이저들과는 격이 다른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낡은 코트 차림에 한쪽 팔이 기계 의수로 대체된 사내. 그의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나 있었다.
“과연... 강진혁의 유산답군. 타인의 기억을 먹어 치우는 괴물이라니.”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엔트로피의 전직 보안 국장이자, 강진혁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한태준’이었다. 그는 기업이 무너진 혼란을 틈타 유나를 차지해 새로운 권력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꼬마야, 네가 가진 그 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네가 사람들에게 다가갈수록, 너는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게 될 거야. 결국 네 곁엔 아무도 남지 않겠지. 나만이 그 저주를 멈춰줄 수 있다.”
태준이 기계 의수를 뻗으며 다가왔다. 유나는 뒷걸음질 치다 벽에 막혔다.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 유나의 뇌 신경망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강진혁의 잔류 의식’이 깨어났다.
[유나야, 두려워하지 마.]
진혁의 목소리가 뇌울림으로 들려왔다. 동시에 유나의 시야가 푸르게 변하며, 한태준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강진혁이 평생을 바쳐 익힌 ‘기억 읽기’와 ‘신체 제어’ 기술이 유나의 작은 몸을 빌려 재현되고 있었다.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이레이저의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자세는 이미 전설적인 은행원의 살수(殺手) 그대로였다.
“아빠가 그랬어요... 빚진 건 꼭 갚아줘야 한다고.”
소녀의 눈동자에 서린 푸른 안광이 한태준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 복수의 연쇄는 끝난 것이 아니라, 강진혁의 딸 유나를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네오 서울의 폐허 위로, 기억을 먹는 소녀와 기억을 되찾으려는 망령들의 잔혹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한태준의 기계 의수가 유나의 목을 움켜쥐기 직전, 지하 선로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유나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파동은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 수백 미터 내의 모든 전자적 신호와 생체 전기를 강제로 동기화하는 ‘영역 전개’였다.
“커헉···! 이, 이 힘은···!”
태준의 시야가 뒤틀렸다. 그는 유나를 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수천 명의 인생이 자신의 뇌세포를 난도질하는 환각에 빠졌다. 엔트로피 뱅크에 저당 잡혔던 노숙자의 절망, 자식을 판 어머니의 죄책감, 그리고 방금 자신이 쓰러뜨린 부하들의 단편적인 공포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의 이성을 덮쳤다.
유나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왼쪽 눈은 강진혁의 의안처럼 시리게 빛났고, 오른쪽 눈은 수아의 슬픈 깊이를 담고 있었다. 소녀는 단검을 쥔 채 태준의 가슴팍을 향해 파고들었다. 아이의 움직임이라기엔 너무나 정교하고 치명적인, 강진혁이 평생을 바쳐 완성한 ‘은행원의 암살술’이었다.
챙!
태준이 본능적으로 기계 팔을 들어 막아냈지만, 단검은 장갑판 사이의 미세한 틈을 찢고 그의 어깨 근육을 관통했다.
“아빠가··· 아프게 하지 말랬는데.”
유나의 목소리는 두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 기묘한 울림을 냈다.
“너희들이 자꾸 아빠를 뺏어가니까··· 나도 너희 걸 뺏을 수밖에 없잖아.”
유나가 단검을 비틀자, 태준의 머릿속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 하나가 증발했다. 그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누구를 위해 권력을 탐했는지에 대한 ‘근원적 동기’가 유나의 뇌로 흡수된 것이다. 태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초점을 잃으며 흐릿해졌다. 목적을 잃은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안 돼··· 내 기억··· 내 야망이···!”
태준은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유나는 그를 쫓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타인의 기억을 먹어 치울 때마다, 그녀 자신의 미약한 자아는 거대한 타자(他者)들의 삶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유나야, 정신 차려. 남의 기억에 네 자신을 내주면 안 돼.]
진혁의 잔류 사념이 그녀의 정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 점점 노이즈가 섞여가고 있었다. 유나는 이제 걸어 다니는 ‘기억의 도서관’이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의 폭탄’이었다.
그때, 지하철 선로 너머 지상에서 거대한 서치라이트 불빛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엔트로피의 붕괴 이후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세력, ‘기억 수집가(Memory Collectors)’ 연합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가치 있는 데이터를 채굴해 신인류의 귀족이 되려는 자들이었다.
“저기 있다! ‘0번 샘플’이다!”
중장갑차의 엔진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유나는 일어섰다. 그녀의 등 뒤로 은빛 나노머신이 다시 돋아나 작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비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데이터를 흡수하기 위한 안테나였다.
유나는 폐허가 된 지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무수히 많은 ‘기억의 실’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사랑을 갈구하고, 누군가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전부··· 돌려줄게요.”
유나가 손을 뻗자, 네오 서울 전체의 네트워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히 기억을 뺏는 포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아빠 진혁이 못다 한 일, 즉 인류가 진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억의 균형’을 맞추는 조율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강진혁이 시작한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딸 유나가 짊어진 ‘기억 부채’의 정산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차가운 강철의 도시 위로 잊혔던 인간의 온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빠달려
james2
주성치개새
하리하리
멀던
랙왕
Skywalker21
afiguwl
코카콜라
술의눈


조금 길게 살짝 리듬을 줘서 일상도 좀 나오고 하면 꽤 괜찮을 것 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데뷔 꼭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