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5년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라고 불린 친일파 박춘금, 그 후의 삶은
사후에는 ‘송덕비’, 재산은 딸과 후손들에게 상속
“일본 야쿠자이자 정치깡패, 일제강점기 유일한 조선인 출신 일본 중의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협력자.”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확산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의 이력이다. 게시물이 처음 올라온 것은 2020년, 6년 전이다. 매해 3월이나 8월, 일본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회자되는 이미지다. 게시물에서 ‘미스터리’라고 하는 것은 다음 대목이다.
“일본제국 심장부 도쿄에서 일본인들의 투표로 당선되어 제국의원 3선 해먹은 ‘조선인’ 박춘금. 창씨개명 안하고 조선 이름 그대로 출마하고도 당선. 이 ○○한테 밀려 낙선한 일본인 후보는 뭐하는 ○○냐.” 위에 적은 이력은 밑에 따라 붙은 그의 일제 시대 경력이다.
확인해보면 나열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사실이다. 다만 특정 야쿠자 조직에 가입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동아일보 기자 폭행’도 실제 피해자는 기자가 아니라 동아일보 사장과 이사, 변호사였다.
경남 밀양 출신인 박춘금은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과 폭력조직을 거쳐 1921년 상애회(相愛會)를 조직했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일자리와 숙소를 알선한다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고 파업과 노동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박춘금은 일본 우익 거두 도야마 미쓰루 등과 교류했고 일본 경찰·기업의 지원도 받았다. 야쿠자라기보다 식민통치 권력과 결탁한 폭력조직의 실력자이자 정치깡패에 가까웠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약 300명 규모의 노동봉사단을 조직해 경찰과 함께 시신 처리와 조선인 식별·구금 작업에 관여했다. 박춘금이 조선인을 직접 살해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학살이 벌어진 뒤 경찰의 조선인 색출과 사후 처리에 협력한 행적은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보고서에 기록돼 있다.
상애회는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현장에서도 폭력을 휘둘렀다. 1924년 전남 신안 하의도 소작쟁의에 개입해 농민들을 공격했다. 일본의 수력발전 공사장에서는 상애회의 강제 가입에 반발한 조선인 노동자들과 충돌해 3명이 숨지고 50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른바 ‘동아일보 기자 폭행’ 사건은 1924년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을 비판하자 박춘금은 부하를 시켜 송진우 사장과 김성수 이사를 서울의 한 요릿집으로 유인했다. 두 사람은 약 3시간 동안 감금돼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 변호사 유문환도 폭행으로 다쳤다.
박춘금은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에 당선됐다. 일제강점기 일본 중의원에 선거로 당선된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조선인의 참정권과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식민지배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을 ‘새로운 일본인’으로 편입하는 완전한 동화를 주장하면서 징병과 일본군 복무 의무도 함께 부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학병과 징병 참여를 선동했다. 1944년 학병 격려 연설에서는 “학도병 4천이나 5천이 죽어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같은 해 군수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이사로도 참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적으로 규정한 폭력단체 대의당을 조직했다. 박춘금 등을 겨냥한 대한애국청년당이 그해 7월 서울 부민관에서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 부민관 폭탄의거다. 대의당이 패전 직전 ‘조선인 30만명 학살’을 계획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30만명이라는 수치는 이후 연구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일제 35년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온라인에서 지목된 친일파 박춘금. 2020년 만들어진 이 이미지는 매년 3월 또는 8월, 일본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온라인에 회자되고 있다. aggag.com 캡처해방 직후 박춘금은 일본에 머물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9년 7월 외무부에 박춘금 등 일본 체류 반민족행위 혐의자 4명을 체포해 국내로 압송하도록 맥아더사령부에 요청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체포와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와 친일 경찰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박춘금에 대한 처벌도 무산됐다.
박춘금은 이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1955년에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고, 1957년 일한문화협회 설립에 참여해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1962년에는 도쿄의 무역회사 아세아상사 사장이 됐다. 해방 전 노동자 탄압과 전쟁 협력 행위로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박춘금은 같은 해 5월 26일 18년 만에 귀국했다. 1977년 9월 16일자 경향신문은 박춘금의 사진과 함께 “반민특위의 손을 벗어났던 그는 62년 5월 26일 18년 만에 귀국, 고국에의 향수를 달래기도 했었다”고 보도했다. 박춘금은 국내에 정착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1973년 3월 31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고향인 밀양의 부친 묘 아래에 안장됐다. 박춘금이 관여했던 일한문화협회는 1992년 묘 옆에 ‘박춘금 선생 송덕비’를 세웠다. 친일 행적을 뺀 채 한일 친선에 기여한 인물로 추켜세운 비석이었다. 시민단체의 철거운동이 벌어진 뒤 2002년 묘와 송덕비가 철거되고 유해도 이장됐다.
박춘금의 재산은 후손들에게 넘어갔다. 그가 1926년 취득한 밀양 교동 토지 1269㎡는 1989년 딸에게 상속됐고, 2002년 다시 후손에게 넘어간 뒤 2018년 매각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100억원대 부동산도 딸과 후손들에게 증여됐다가 2018년 팔렸다. 재산을 물려받은 후손 가운데 일부는 일본 국적자로 파악됐다.
박춘금은 친일인명사전뿐 아니라 정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올라 있다. 그의 해방 후 삶에서 확인되는 것은 새로운 폭력범죄보다 처벌의 부재다. 조선인 노동자를 탄압하고 침략전쟁을 선동한 인물은 해방 후에도 재일사회와 한일 친선단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사후에는 송덕비가 세워졌고 재산은 후손들에게 상속됐다. 박춘금의 생애가 ‘미스터리’로 불린 이유는 정체를 알 수 없어서가 아니다. 그처럼 행적이 분명한 인물이 끝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Comments
너구리양
08.14 08:54
우룽싸
08.14 08:55
탐진치3독
08.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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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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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1004
08.14 12:19
sss55
08.14 15:35
가프옹
08.14 15:36
sarara
08.14 15:52
술의눈
08.15 00:28
da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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