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데뷔작 티카페에 바칩니다. 2
그 기억은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한 순도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 기억이 다시 세상 밖으로 유출된다면, 누군가는 이것을 이용해 제2의 엔트로피를 세우려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은 망각보다 끈질긴 법이니까.
"강진혁, 자네는 딸을 살렸지만... 세상에 너무나 위험한 불씨를 남겼군."
그때, 기록실의 무거운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형체는 뜻밖에도 한때 유나를 추격하던 '이레이저'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살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본능적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길 잃은 영혼이었다.
"배가... 고파요. 아니, 마음이 고픈 건가?"
사내가 멍하니 물었다. 묵은 한숨을 내쉬며 타자기 옆에 놓인 오래된 인쇄물을 건넸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닌 종이에 새겨진, 누군가의 평범한 여행 기록이었다.
"이걸 읽게. 이건 자네의 기억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증거지. 이제 우리는 남의 기억을 훔치는 게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공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타인의 감정을 강제로 이식받던 자극적인 쾌락과는 달랐다. 종이 위에서 피어나는 타인의 삶은 은은하고도 묵직하게 그의 텅 빈 가슴을 채웠다.
묵은 다시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강진혁의 투쟁과 수아의 희생, 그리고 유나가 선택한 망각의 역사를 한 자 한 자 기록해 나갔다. 이 기록은 언젠가 인류가 다시 기억의 늪에 빠지려 할 때, 가장 아픈 예방주사가 될 것이다.
도시 위로는 이제 인공 태양이 아닌, 구름 뒤에 숨어있던 진짜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서로의 손을 잡았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피부를 맞댄 온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강진혁이 남긴 마지막 부채, 그것은 '서로를 다시 알아가야 한다'는 고된 숙제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꺼이 그 이자를 감당하며, 새로운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유나의 영혼은 이제 도시의 바람이 되어 사람들의 귓가를 스쳤다. 누군가 이유 없이 미소 지을 때, 혹은 누군가 이유 없이 눈물 흘릴 때, 그것은 유나가 남긴 아주 작은 감정의 씨앗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기억 부채의 시대가 저물고, '공감의 시대'가 서서히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지하 기록실의 공기는 정지된 시간처럼 무거웠다. 노기록사 ‘묵’이 두드리는 타자기 소리만이 규칙적인 박동처럼 고요를 찢고 있었다. 찰칵, 찰칵. 쇠붙이가 종이를 때릴 때마다 인류가 잊기로 맹세한 치욕스러운 탐욕의 역사가 검은 활자로 박제되었다.
그의 책상 모서리에 놓인 은색 펜던트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유나가 자신의 존재를 불태우며 격리해두었던 단 하나의 기억—강진혁과 서수아가 딸을 품에 안았던 그 ‘순수한 환희’가 담긴 결정체였다. 그것은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에덴의 파편’이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유혹의 씨앗이었다.
“...누군가 오고 있군.”
묵이 타자기를 멈췄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기록실 외부, 층층이 쌓인 폐허 너머에서 접근하는 이질적인 박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망각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민들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고도로 절제된, 그리고 기계적인 정밀함이 섞인 금속성 보폭이었다.
치익—
납으로 된 육중한 격벽이 강제로 뜯겨 나갔다. 먼지 구름 사이로 나타난 형체는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석상에 가까웠다. 전신을 초고밀도 탄소 섬유 슈트로 감싼 사내, 그의 가슴팍에는 오래전 사라진 줄 알았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엔트로피의 창립 초기, 오창현조차 두려워해 봉인했던 비밀 결사 ‘리콜렉터(Recollector: 기억 수집광)’의 상징이었다.
“기록사 묵. 자네가 아직 살아있을 줄이야.”
사내의 목소리는 합성된 음성처럼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그는 슈트의 기능을 활성화해 방 안의 잔류 에너지를 스캔했다. 그의 시선이 곧장 은색 펜던트에 고정되었다.
“그것이군. 인류의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가치를 지닌 ‘제로 포인트(Zero Point)’의 데이터.”
“이건 데이터가 아니네.” 묵이 펜던트를 가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이건 한 가족의 유언이자, 다시는 거래되어서는 안 될 인간의 존엄이지.”
“존엄이라... 망각한 대중에게 존엄은 사치다. 그들은 지금 기억이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지.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몰라 굶주린 짐승처럼 서로를 핥고 있다. 우리가 이 ‘환희’의 씨앗을 다시 배양한다면, 네오 서울은 이전보다 더 완벽한 질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리콜렉터의 사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나노 레이저가 뿜어져 나와 묵의 방어선을 위협했다. 하지만 묵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기억의 노예로 살았던 자들의 종말을 지켜본 증인이었다.
“자네들은 망각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우는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공간을 만드는 거라네. 강진혁의 딸이 목숨을 걸고 비워둔 이 공간을, 자네들의 그 가짜 기쁨으로 다시 채우게 두지 않겠어.”
묵이 책상 밑의 레버를 당겼다. 순식간에 기록실 전체에 고전압 전류가 흘렀고, 보관되어 있던 수만 권의 종이 기록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데이터가 아닌 ‘물질’로 된 기록을 태워, 그 연기로 리콜렉터의 센서를 마비시키려는 도박이었다.
“미친 노인네!”
사내가 돌진했다. 하지만 불길 속에서 묵은 이미 펜던트를 자신의 가슴 포켓에 넣고 비밀 통로로 몸을 던진 뒤였다.
지상으로 이어진 통로는 좁고 가팔랐다. 묵은 쿨럭이며 연기를 뱉어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단순한 기록사가 아니었다. 그는 인류의 마지막 ‘진짜 감정’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지상으로 나오자 차가운 새벽바람이 폐부를 찔렀다. 네오 서울의 잔해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망각의 안개는 걷혔지만, 도시는 여전히 정적에 잠겨 있었다. 거리에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명령에 움직이는 인형은 아니었다.
묵은 결심했다. 이 펜던트를 파괴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 안에 담긴 ‘사랑의 증명’까지 없애버린다면, 강진혁과 수아의 희생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이 기억을 세상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질 때까지 숨겨야 했다.
그는 도시 외곽, 오염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나가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자리에 작은 돌무덤이 세워져 있었다. 묵은 그 돌무덤 아래 깊숙이 펜던트를 묻었다.
“유나야, 아빠의 선물을 잠시 빌려다 주마. 언젠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남의 기억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눈물 흘릴 줄 알게 되는 날... 그때 이 선물을 다시 꺼내주마.”
묵이 돌무덤을 덮는 순간, 등 뒤에서 리콜렉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사내는 이미 여러 명의 증원 병력을 이끌고 절벽을 포위하고 있었다.
“펜던트는 어디 있나? 순순히 넘긴다면 네 기억만은 온전히 보존해주지.”
묵은 천천히 돌아서서 지팡이를 짚고 섰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기묘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이미 늦었네. 나는 방금 내 모든 기억을 이 땅의 흙에 동기화했거든. 내가 죽으면 좌표는 영원히 사라질 거야. 이제 자네들이 할 일은 하나뿐이네. 나를 죽여서 이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거나, 아니면 나를 살려두고 평생 이 넓은 대지를 뒤지며 헛된 꿈을 꾸는 것.”
리콜렉터의 사내가 분노로 이를 갈며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묵은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기억은 억압할수록 강해지고, 망각은 인내할수록 깊어진다는 것을.
머나먼 수평선 너머로 진짜 태양이 솟구쳤다. 붉은 햇살이 네오 서울의 강철 숲을 비추자, 이름 없는 시민 한 명이 길가에 핀 들꽃을 보며 처음으로 ‘예쁘다’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데이터의 보조 없이, 거래의 대가 없이 탄생한 순수한 인간의 감정이었다.
기억 부채의 종말, 그리고 자생적 감정의 시대가 피로 쓴 일기장 위에 새로운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콜렉터의 총구가 묵의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묵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낡은 무전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고주파 통신망이 아닌, 네오 서울 지하 깊숙이 묻혀 있던 구식 아날로그 주파수를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지금이다. 빚을 갚을 시간이야.”
묵의 짧은 명령과 함께, 절벽 아래 오염된 검은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더니, 수천 톤의 바닷물이 역류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리콜렉터의 사내들이 당황하며 총구를 바다 쪽으로 돌렸지만,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진혁이 죽기 전, 도시 전체의 나노머신들을 바다로 유인해 응집시켜 놓았던 ‘기억의 무덤’이자 ‘최후의 수호자’였다. 은빛 액체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들이 파도를 가르고 절벽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게 뭐야! 엔트로피의 나노 군단이 왜 바다에...!”
“진혁이는 알고 있었네. 인간의 탐욕은 망각의 파도조차 거슬러 올라올 것이라는 걸.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육신을 이루던 나노머신들을 바다의 소금기 속에 숨겨두었지.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들은 이 땅의 마지막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말이야.”
나노 거인들이 리콜렉터들을 덮쳤다. 총탄은 은빛 액체 속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갔고, 사내들의 최첨단 슈트는 나노 입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분해되어 고철로 변했다. 리콜렉터의 수장은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가 품었던 야망과 데이터 수집광으로서의 집착은 차가운 심연 속으로 영원히 매장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나노 거인들은 다시 액체로 변해 묵의 발치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묵을 호위하며 슬픈 진동을 내뿜었다. 묵은 떨리는 손으로 유나의 돌무덤을 쓰다듬었다.
“이제 됐어... 이제 아무도 이 기억을 훔치지 못할 게다.”
그때, 묵의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죽은 강진혁도, 수아도 아니었다. 망각의 파도를 타고 살아남아 도시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인이 된 듯한 유나의 목소리였다.
[기록사 할아버지... 들리세요? 전 이제 더 이상 남의 기억을 먹지 않아도 돼요. 제 안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기억들이 있거든요. 오늘 아침엔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직접 만들어봤어요.]
묵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한 데이터 펜던트가 아니었다. 인류가 스스로 감정을 빚어낼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묵은 타자기를 다시 고쳐 쥐었다. 그는 절벽 끝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장편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인류는 마침내 기억의 부채를 청산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갚아야 할 이자가 아니라,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이름 없는 친절뿐이다.’
네오 서울의 폐허 위로, 더 이상 엔트로피의 로고는 빛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저마다의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산 것이 아닌, 스스로 타올라 만든 진짜 생명의 빛이었다.
Comments
zinn
03.06 19:28
오빠달려
03.06 20:40
koko
03.06 19:37
오빠달려
03.06 20:40

열라짱나
03.06 20:12
오빠달려
03.06 20:41
ttanga4242
03.06 20:22
오빠달려
03.0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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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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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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