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이 쓸모없었다는 주장이 바보인 이유
독립운동으로 독립하지 못 했으니 독립운동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광복 70주년에 조선일보에 올라온 칼럼
조선은 독립하고 오키나와는 독립하지 못한 이유 의 일부분입니다
조선왕조는 1392년, 류큐왕국은 1429년에 건국되어 두 왕조의 건국 시기가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독립 국가였지만 호혜 실리의 차원에서 당시 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482년, 류큐왕국은 450년 지속되어 두 왕조의 연수도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망한 시기도 비슷합니다. 류큐왕국은 1879년에 일본에 무력 병합되어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되었고, 조선은 1910년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류큐왕국과 조선왕조 사이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한민국으로 독립을 회복한 반면, 류큐왕국은 독립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당시 오키나와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유서깊은 유적들을 대하면서 “왜 류큐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지 못하고 영영 일본의 부속도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때 이후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경희대학교 강효백 교수의 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효백 교수는 「루즈벨트와 장제스」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최근에 공개된 카이로회담의 회의록과 미국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장을 토대로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서로 회담을 통해 종전 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카이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강탈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카이로 선언문이 우리 민족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 선언문 속에 최초로 명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사이에 개인 회담은 1차 회담이 11월 23일에 열렸고, 2차 회담은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열렸습니다. 두 회담에서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류큐 열도를 만약 중국이 원한다면 옛날 류큐왕국이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은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류큐 열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만약 장 총통이 당시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오키나와와 인근 140여 개의 섬들은 중국령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장제스 총통이 류큐 열도를 넘겨주겠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장제스 총통은 타이완이나 만주처럼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영토에만 관심이 있었다든지, 대륙 출신인 장제스 총통은 해양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든지, 당시 장제스 총통은 모택동의 공산군을 섬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열도 같은 곳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든지, 류큐 열도를 제안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의를 장 총통이 의심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설들입니다.
이러한 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제스 총통은 류큐 열도를 가지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은 거절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왜 장제스 총통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조그마한 한국의 독립은 주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강효백 교수는 분명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류큐왕국에는 독립을 원하는 독립투사들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장제스 총통은 청년 윤봉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24세였던 청년 윤봉길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를 괴멸시킨 것을 본 후, 장제스 총통은 자기 휘하 100만 중국군이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장제스 총통은 당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 총통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을 불러 접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완전 독립과 국제 공동 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 조건을 그대로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카이로회담이 열린 첫 날이던 1943년 11월 22일 장제스 총통은 카이로에서 자신의 일기장에 종전 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제안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카이로회담 석상에서 실제로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처칠 수상의 제안을 일축하고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문에 명문화시켰습니다.
장제스 총통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장제스 총통이 한국 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강효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올해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70년 전에 우리에게 잃어버린 빛을 회복할 수 있는 광복의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일본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군대가 있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강대국에 의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강대국들이 조선 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던 류큐왕국까지 책임져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강대국들이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과 죽음의 속박을 감수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주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의 패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leechland/220675605765
광복 70주년에 조선일보에 올라온 칼럼
조선은 독립하고 오키나와는 독립하지 못한 이유 의 일부분입니다
조선왕조는 1392년, 류큐왕국은 1429년에 건국되어 두 왕조의 건국 시기가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독립 국가였지만 호혜 실리의 차원에서 당시 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482년, 류큐왕국은 450년 지속되어 두 왕조의 연수도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망한 시기도 비슷합니다. 류큐왕국은 1879년에 일본에 무력 병합되어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되었고, 조선은 1910년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류큐왕국과 조선왕조 사이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한민국으로 독립을 회복한 반면, 류큐왕국은 독립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당시 오키나와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유서깊은 유적들을 대하면서 “왜 류큐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지 못하고 영영 일본의 부속도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때 이후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경희대학교 강효백 교수의 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효백 교수는 「루즈벨트와 장제스」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최근에 공개된 카이로회담의 회의록과 미국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장을 토대로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서로 회담을 통해 종전 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카이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강탈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카이로 선언문이 우리 민족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 선언문 속에 최초로 명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사이에 개인 회담은 1차 회담이 11월 23일에 열렸고, 2차 회담은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열렸습니다. 두 회담에서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류큐 열도를 만약 중국이 원한다면 옛날 류큐왕국이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은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류큐 열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만약 장 총통이 당시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오키나와와 인근 140여 개의 섬들은 중국령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장제스 총통이 류큐 열도를 넘겨주겠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장제스 총통은 타이완이나 만주처럼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영토에만 관심이 있었다든지, 대륙 출신인 장제스 총통은 해양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든지, 당시 장제스 총통은 모택동의 공산군을 섬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열도 같은 곳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든지, 류큐 열도를 제안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의를 장 총통이 의심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설들입니다.
이러한 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제스 총통은 류큐 열도를 가지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은 거절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왜 장제스 총통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조그마한 한국의 독립은 주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강효백 교수는 분명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류큐왕국에는 독립을 원하는 독립투사들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장제스 총통은 청년 윤봉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24세였던 청년 윤봉길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를 괴멸시킨 것을 본 후, 장제스 총통은 자기 휘하 100만 중국군이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장제스 총통은 당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 총통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을 불러 접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완전 독립과 국제 공동 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 조건을 그대로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카이로회담이 열린 첫 날이던 1943년 11월 22일 장제스 총통은 카이로에서 자신의 일기장에 종전 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제안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카이로회담 석상에서 실제로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처칠 수상의 제안을 일축하고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문에 명문화시켰습니다.
장제스 총통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장제스 총통이 한국 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강효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올해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70년 전에 우리에게 잃어버린 빛을 회복할 수 있는 광복의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일본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군대가 있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강대국에 의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강대국들이 조선 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던 류큐왕국까지 책임져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강대국들이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과 죽음의 속박을 감수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주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의 패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leechland/22067560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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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짜요


계란으로 바위치는것도 상황에 따라 해야 할때도 있는거겠죠
장제스가 일제 점령국가들 전부에 대해 독립운동 후원을 한것도 아닐테고 말이죠.
결과만 놓고 과정을 끼워맞추려는 개소리는 상종할 가치도 없음
가는 그날 까지도 광주는 폭동이고 독립운동은 무쓸모였다고 하면서 갈거예요..
회상할 삶도 정리할 변변한 주변도 없는 한심한 인생일테니까요
앞으로 개소리는 계속 될 거임...
우크라이나마냥 내놔라고 입만 쳐 벌리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죠
일본군스파이활동도 했음
그래서 같이 싸웠기에 장제스가 2차세계대전 승전국회담에 참석해
한반도 독립 도와줌, 미국이나 영국은 생각도 안함
오키나와 주민들 한탄 들어보면....독립운동 안했으면 우린 지금 오키나와임
오키나와인들은 인기있어도 연에계에서 조차 차볇 받는다잖음
국내진공 계획까지 성공했으면 완전한 독립국으로 남았을텐데 통탄할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