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에게 해고당한 김초희 감독 썰
(중략)...공부를 하면서 돈을 벌고, 유학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무작정 유학을 왔는데 녹록지 않은 거에요. 되게 고생을 많이 했고요. 고생의 수준이 한국과 달랐습니다. 유학을 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 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프랑스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 나라더라고요. 스페인이나 브라질 친구가 훨씬 좋았는데, 프랑스 친구들은 성향이 너무 달라서 그냥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비장한 각오로 프랑스에 왔어요. 떠날 때 친구들이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웃음). 다 유학을 가면 성공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위에 그런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요. 비행기만 타면 성공할 것 같았나봐요. 친구들이 눈에 밟혀서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웃음).
‘졸업장이라도 하나 따자’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갈 명분을 만들려고 했어요. 2년 정도 어학하고 준비를 해서 파리 1대학에 갔는데요. 그 학교는 ‘영화 이론’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영화 감독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었고요. 학비가 무료여서 그냥 들어갔습니다.
가서 이론 공부를 하는데,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갑갑했어요. 어느새 29살이 되었거든요. 23살부터 29살까지 카메라도 만지지 못하고 영화를 찍지도 못하니까 갈증이 너무 심한 겁니다. 나는 하루빨리 현장에 가서 사람들과 같이 으쌰으쌰하면서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아직도 영화를 보면서 분석하는 제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더라고요.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봐서 겁은 없었어요. 학교는 다니되, 돈도 벌고, 그냥 내가 영화 찍어야지 하면서 알바비를 모아서 카메라와 조명을 샀습니다.
파리에서 3개 정도의 단편영화를 찍게 되는데요. 카메라만 제 손에 있다면, 1년에 영화 100편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근데 영화가..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인건비는 고사하고 밥 먹을 돈도 녹록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한정적인거에요. 결국 자기 아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기가 모르는 얘기를 하는 건 다른 차원이니까요.
이렇게 영화를 찍을 바에야 한국을 가야겠다 했어요. 석사를 막 끝내고, 졸업장을 땄으니까 한국에 가도 됐을 때였어요. 실제 찍어보니까 돈도 많이 들거니와,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고 영화를 찍은 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형편 없었습니다. 이건 긴급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영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이건... 제가 봐도 아닌 거에요(웃음).
영화는 여러 가지가 필요해요... 뭐.. 하여튼 복잡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파리에서 한국에 유명한 감독이 영화를 찍으러 오는데요. 프랑스어가 가능한 연출부를 뽑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 연출부를 하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석사가 끝나고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논문 쓸 때가 아니면 수업도 없고, 널널한 편이었거든요.
그게 홍상수 감독님 제작부였어요. 근데 돈을 안 준대요. 처음엔 거절했는데, 영화를 더 배우고 싶은 마음도 컸죠. 사실 그 마음이 더 크고 급했어요. 돈을 안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프랑스 현장 총괄 부장을 찾아가서 물어봤습니다. “돈을 안 준다고 해서 포기한 사람인데, 당신도 돈 안 받냐. 나는 견습생이니까 돈을 안 받는 거냐”라고 물어봤는데, 자기도 돈을 받기로 했대요. 예산이 줄어들고,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면서 돈을 안 받기로 했대요. 그래서 그럼 전 하겠다고 했습니다.
파리에서 33일 동안 촬영을 했어요. 제가 맡은 임무는 연출부 중 미술 소품을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미술 감독이 따로 없고, 연출부에서 미술과 소품을 담당하는 특이한 구조였습니다. 이건 자랑인데요. 33일 동안 70만 원 정도 썼더라고요. 한국 분량 3회차 찍는데 70만 원 썼답니다(박수).
제가 수완이 있었던거죠. 제작부를 비롯해서 PD님까지 널리 소문이 난 겁니다. 희한한 애가 들어왔다고요. 보석 같은 아이다!(웃음) 홍상수 감독님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더 이상 영화투자를 받아 돈을 벌 수 없는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나만의 방식으로 독립영화를 제작하면서 만들어갈 예정이다. ‘영화사 살림을 해 나갈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나랑 같이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달콤한 제안이었죠.
너의 영화도 찍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저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에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한국에 돌아갔습니다. 파리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제가 결혼할 남자친구도 있었거든요. 그 친구도 버리고 갔습니다(웃음). 그니까 소위 말해서 파투 낸 거죠. 감독님의 제안에 눈이 멀어서 보따리를 싼 뒤, 한국에 들어왔죠.
들어와서 저는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실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이후에 PD를 답니다. 투자, 배급, 홍보가 영화의 시작부터 개봉까지의 과정인데요. 이걸 모두 제작사가 주관합니다.
제가 1부터 100까지 다 하는 제작사를 만드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당연히 첫 월급은 없었고요. 그 다음은 70만 원, 120만 원, 150만 원, 그리고 영화사가 안정될 때 마지막 월급이 200만 원이었습니다. 돈 생각 하지 않고,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사가 안정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몰빵’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참 아이러니한게요. ‘이제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이제 밥 벌어먹고 살겠다’ 싶을 때 위기가 닥쳤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위기는 늘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더라고요. 제가 존경하고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님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겁니다.
김민희 배우와요. 그게 왜 위기냐면, 그때 김민희 배우가 아가씨라는 영화의 주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CJ에서 날마다 전화가 왔고, 감독님 가족들을 포함해서 제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저를 앞세워서 뒤로 숨으신 분이거든요. ‘한 사람의 모자란 부분이 너무 크게 부각됐을 때 찾아오는 위기’이죠. 제가 그 때 감독님께 많이 실망했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기자들의 전화도 너무 많이 받았고요.
더 힘들었던 건, 영화 1편을 마치려면 엄청난 공정이 들어가는데요. 그 공정 하나하나마다 다 펑크가 났습니다. 업체 사람들에게 물어줘야 할 돈 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이 저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했어요.
제가 그래서 초강수를 둡니다. 제가 ‘그만둔다’고 하면 정신을 차릴 줄 알고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만둔다는 건 그 분이 영화를 못 만드는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처음엔 저를 붙잡으시더라고요. ‘1년간 유급휴가를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7년간 명절 없이 일만 했었거든요.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월급을 받으면서 1년간 휴가를 갈 수 있다니 너무너무 좋은 제안이잖아요? ‘본인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다 정리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행간에 떠도는 복잡한 소문도 무사히 잘 끝낼테니, 너는 쉬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제 밑 직원 2명에게 인수인계를 하게 됩니다. 돈이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하는지 등의 공정을 2명에게 한 달간 인수인계했어요. 그리고 캐나다에 1년의 유급휴가를 떠났는데요.
정확히 한 달 후에, 제가 사랑하던 직원 2명과 연락이 안 됩니다. 이메일 주소도 바뀌어 있고요. 정산할 수 있는 은행 거래도 다 바뀌어 있었습니다. 음.. 감독님에게 잘리게 된 거죠.
저는 캐나다에서 너무 힘들었고 죽고 싶었습니다. 방송국에 기회만 되면, 하나부터 열, 아니 100까지 다 알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를 살리러 온 배우가 있었습니다.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막 끝난 정유미 배우였습니다. 뒤풀이를 뒤로하고, 비행기 값 500만 원을 쏟아부어서 저를 살리러 몬트리올에 왔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다시 일깨워 준 친구입니다. 돌아가면서 용돈과 카드도 하나 주고 갔습니다. 다시 ‘해피 초희’가 되라고요.
그 때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영화가 나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는 게 뭐고, 인생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옆을 못 본 거죠. 당장의 책임을 감독님에게만 돌렸지만, 사실 그건 감독님 인생이고요. 내 인생은 내 인생이죠.
한국에 돌아와 ‘영화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때 벌써 20년이 지나있더라고요. 그런데 다행히도 제 옆에도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있었던 것처럼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저를 지지해준 배우와 스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더이상 홍상수 감독님의 PD가 아니었기 때문에 밀물 썰물 빠져나가듯이 싹 인맥이 갈라지더라고요. 제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영화가 이 영화입니다(박수). 공적 기금이라고 할까요. 시나리오를 써서 겨우 2억 2천만 원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위기를 극복할 때 얼마나 사람의 힘이 중요한지 정말 몸으로 체득하면서 배웠고요. 그러면서 인생에서 ‘복’이란 뭔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아갈 힘만 있으면 복이다’라는 것을요. 사실.. 이렇게 훈훈한 강연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요(웃음). 하나가 좋아지면, 열이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캐나다에 있으면서 죽고 싶었을 때, 제가 제일 먼저 한 게 밥 먹는 거, 씻는 거였거든요. 그걸 기본적으로 하니까 차츰차츰 좋아지더라고요. 여전히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저를 도와준 친구들을 여전히 가슴에 잘 챙기고 있고요. 저는 달라졌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말 그대로 인생입니다. 삶이요. 그 다음이 관계이고요. 그 다음이 일인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일이 앞으로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일을 다시 뒤로 보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운 좋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어서 제게 지난 5년간 정말 많고, 좋은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거절을 하고 딱 하나만 했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하고 싶지 않았고요. 그 많은 기회들을 놓친 걸 후회합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책할만큼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가 저한테 귀하게 와야, 제 인생 자체가 더 좋아진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여유는 휴식이 아닙니다. 어디 하나에 미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요. 하루를 귀하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선택한 걸 귀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선택이 결국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제가 믿고요.
제가 한 선택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절 살린다는 걸 믿습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s
ㅇㅎㅌ
03.03 07:22
koko
03.03 07:32

열라짱나
03.03 07:45

영웅
03.03 09:46
뀨뀨꺄꺄꺄
03.03 12:39
울트라매니아
03.03 16:34
산책
03.03 17:34
안첸그루
03.03 19:28
sss55
03.03 20:33
김군
03.06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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